어머니의 텃밭에는 늘 호박이 있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굵은 줄기를 타고 자라난 청둥호박들이 늦가을 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있다. 지난 주말에 들른 부모님 댁에서 호박을 수확했다. 어머니의 거친 손과 내 손에 묻어나는 하얀 가루. 그 가루는 마치 우리 모녀의 세월을 닮은 듯했다.
"호박은 늙어야 제 맛이란다."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말씀에 깊은 뜻이 담겨있다. 젊은 시절의 나는 이 말씀이 그저 호박의 숙성도를 이야기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호박 이야기가 아니었음을 이제는 안다.
젊은 날의 나는 푸르른 호박처럼 단단한 꿈과 야망을 품고 있었다. 직장에서의 치열한 경쟁, 완벽한 엄마이자 아내가 되기 위한 분투, 그리고 늘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기만 했던 그 시절은, 마치 덜 익은 푸른 호박의 맛처럼 거칠고 날것의 열정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참 이상한 연금술사다. 50대를 살아가며 나도 모르게 청둥호박처럼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얼굴의 주름은 늘어갔지만, 그만큼 마음의 그릇은 더욱 넓어졌다. 실수를 대하는 마음에 더 많은 이해가 깃들었고, 자녀들의 선택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더 깊은 사랑이 담기게 되었다.
어제는 텃밭에서 수확한 호박으로 죽을 끓였다. 뜨거운 김이 오르는 호박죽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그 맛이 떠올랐다. 그때는 호박죽 한 그릇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을 몰랐다. 그리고 시간이 주는 깊은 맛을 몰랐다.
늙은 호박의 달콤함이 오랜 시간 자연이 빚어낸 선물이듯, 우리의 주름과 흰머리도 시간이 준 특별한 선물이 아닐까. 젊음의 초록빛이 시간 속에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과정,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더 깊어지고, 더 달콤해진다.
이제는 거울 속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그 주름의 깊이만큼 내 안의 지혜도, 사랑도 깊어졌으니까. 마치 늙은 호박이 품은 달콤한 영양처럼, 우리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 풍성한 삶의 맛을 품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주방 창가에 놓인 황금빛 호박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대로 시간이라는 정성 어린 손길 아래에서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익어가고 있다고, 그래서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더 달콤하고,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더 깊은 맛을 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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