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동벨이 울리고 카운터로 갔더니 직원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순간 멈칫했다. 커피가 스스로 걸어 나온 것도 아닌데, 언제부터 커피에게 존댓말을 쓰게 된 걸까. 매장을 나서며 들른 옷 가게에서는 "그 제품은 품절이십니다"라는 안내를 받았다. 품절된 상품이 어르신이라도 되는 건가.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민 10명 중 9명이 이 표현을 "고쳐야 한다"고 답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오늘(12일) 발표한 '개선이 필요한 공공언어 30선' 설문조사 결과다. 지난해 12월, 전국 14세부터 79세까지 3,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이 조사에서 '과도한 높임 표현'은 93.3%라는 압도적 개선 요구를 받았다. 30개 항목 전체 평균이 61.8%였으니, 사물에 존칭을 붙이는 습관에 대한 국민적 불편함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이번 조사가 단순한 맞춤법 점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30개 항목을 들여다보면 우리 언어생활의 세 가지 병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첫째, 과잉 공손의 역설이다. "커피 나오셨습니다"나 "품절이십니다" 같은 사물 높임은 친절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겠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어의 높임 체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저희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도 마찬가지다. 겸손하려다 자기 나라를 낮추는 꼴이 됐다. 응답자의 86.7%가 이 표현을 바꿔야 한다고 답했다. 존중의 마음이 언어의 정확성을 밀어내는 순간, 정작 존중받아야 할 '사람'과 '사물'의 구분마저 흐려진다.
둘째, 차별이 숨어 있는 일상어다. '-충'이라는 접미사를 떠올려 보자. 맘충, 급식충, 설명충. 특정 집단을 벌레에 비유하는 이 말을 87.1%의 국민이 개선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장애를 앓다"는 표현도 78.7%가 문제라고 꼽았다. 장애는 병이 아니다. "앓다"라고 쓰는 순간 장애를 치료해야 할 결함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이미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장애가 있다"로 바꾸는 것은 단어 교체가 아니라 관점의 교체다. "결정 장애"라는 유행어도 그렇다. 결정을 못 내리는 상황을 '장애'에 빗대는 순간, 실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존재가 가벼워진다. '몰카'라는 말이 '불법 촬영'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가볍게 줄인 단어가 범죄의 심각성까지 줄여버린다.
셋째, 소통을 가로막는 외국어 남용이다. 리터러시, 팩트 시트, 이니셔티브 등,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이 말들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문해력, 설명 자료, 주도권이라는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 굳이 외국어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블랙 아이스'보다 '도로 살얼음'이, '스쿨 존'보다 '어린이 보호 구역'이 더 직관적이지 않은가.
여기서 예상되는 반론이 있다. "언어는 원래 변하는 것 아닌가." 맞는 말이다. 한국어도 끊임없이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변화와 잘못된 사용은 다르다. 예를들어 "안 되는 일을 고집하면 안 돼"라는 문장에서 '되'와 '돼'를 혼동하는 건 변화가 아니라 오류다. 90.2%의 국민이 이를 인식하고 있다. 특히 차별 표현의 경우, "다들 쓰니까"라는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다들 쓴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이 상처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신이라면 어떤가. 오늘 하루 동안 쓴 말 중에 이 30선에 해당하는 표현이 몇 개나 있었을까. 아마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생각이 틀리다"고 쓸 뻔한 원고를 "생각이 다르다"로 고쳤고, "염두해 두고"를 "염두에 두고"로 바로잡았다. 쓰는 사람조차 모르게 스며드는 것이 언어 습관의 무서운 점이다.
문체부와 국어원은 이번 발표를 시작으로 대국민 캠페인을 추진한다. 쉬운 우리말 챌린지, 숏폼 영상 제작, 국민 제보 게시판 운영 등이 예고됐다. 제도적 노력은 반갑지만, 결국 변화의 출발점은 개인의 자각이다. 국립국어원 누리집(korean.go.kr)과 쉬운 우리말 누리집(plainkorean.kr)에서 30선 전체 목록과 올바른 사용법을 확인할 수 있다.
말은 생각의 옷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쩌면 순서가 반대인지도 모른다. 말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장애를 앓다"를 "장애가 있다"로 고치는 한 문장이, 커피에게 붙이던 존칭을 거두는 사소한 습관이, 누군가에게는 더 살 만한 언어 환경이 된다. 오늘 내가 쓰는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공기와 같은 환경이다. 그 공기의 질을 결정하는 건 정부가 아니라 바로 우리 각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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