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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속에 숨겨진 마음의 밥상, '밥'꽃나무

생각에 대한 생각 (깊은 사색의 힘)

by 비아토(viator2912) 2025. 4. 22.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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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들은 눈으로 꽃을 먹고, 마음으로 배를 채웠다. 그들은  배고픔을 특별한 방식으로 견뎌냈다. 피어난 꽃의 모양새에서 밥의 형상을 발견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잠시나마 허기를 달랬다. 오늘날 우리는 어떨까? 체중 조절을 위해 먹고 싶은 음식을 참으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종종 '먹방' 영상의 소리와 색으로 허기를 달랜다. 화면 속 윤기 흐르는 음식들이 침샘을 자극하고, 쩝쩝 소리가 귓가를 채우는 동안 우리는 잠시나마 배고픔을 잊는다. 이런 21세기형 대리만족은 풍요 속 역설의 한 단면이다.

수목원의 봄은 이제 '밥'이 핀다. 하얀 좁쌀이 촘촘히 모여 수북한 조팝나무, 밥풀처럼 자잘한 분홍빛 박태기나무, 그리고 곧 피어날 흰쌀밥 같은 이팝나무까지. 이 나무들의 이름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눈으로 먹는 '밥'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조팝나무의 하얀 꽃무리는 바람에 일렁이며 마치 갓 튀긴 좁쌀이 쏟아질 듯 풍성하다. 박태기나무의 선명한 자주색 꽃들은 누군가 흩뿌린 밥풀떼기처럼 가지에 달라붙어 있다. 5월이면 피어날 이팝나무는 흰쌀로 지은 고봉밥이 나무에 걸린 듯 눈부시게 흰 꽃송이를 자랑할 것이다.

 

사진 자료: 조팝나무, 산림청  국립수목원

 

봄이 깊어가는 4월, 특히 '보릿고개'라 불리던 시기는 우리 선조들에게 일 년 중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가을걷이로 쌓아둔 양식은 바닥을 드러내고, 보리는 아직 익지 않은 틈새에서 그들은 배를 쥐어 잡았다. 그러나 한 손으로는 배고픔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꽃을 가리켰다. "저기, 밥이 피었다." 실제로 먹을 수는 없는 꽃이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그 모습만으로도 잠시나마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눈의 포만감이 위장의 울림을 덮었던 것이다.

꽃잎마다 짙게 밴 향기, 바람에 흔들리는 꽃송이의 작은 소리, 그리고 눈부신 색채는 감각의 향연을 선사한다. 선조들은 자연의 이 풍요로운 감각 잔치에서 자신들의 고단한 현실을 위로받았다. 지금의 우리가 스마트폰 화면 속 먹방으로 허기를 달래듯, 그들은 꽃밥으로 배고픔을 달랬다.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의 대리만족은 선택적인 반면, 그때의 대리만족은 생존을 위한 간절한 몸부림이었다는 점이다.

 

사진 자료: 박태기나무, 산림청  국립수목원

 

식물 이름에 스며든 '밥'이라는 글자는 우리 문화의 DNA와도 닮아있다. 농경사회를 살아온 조상들에게 '먹는 것'은 단순한 생리적 욕구가 아닌 삶의 중심이었다. 밥 한 그릇의 무게는 생존과 직결되었다. 눈앞에 없는 밥을 꽃으로 대신하며 이름까지 붙인 것은 절실함의 표현이자,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봄은 선조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칼바람 속에 움츠렸던 생명들이 다시 싹을 틔우고, 뿌리 깊은 나무들은 자신의 존재를 꽃으로 증명하는 계절이다. 그 모습은 마치 어떤 고난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움켜쥐고 살아야 했던 우리 민족의 역사와도 닮아있다. 보릿고개를 넘으며 꽃에서 희망을 보았던 그 눈빛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현대 사회의 풍요는 또 다른 형태의 배고픔을 낳았다. 물질적으로는 넘치지만, 영혼은 허기져 가는 역설적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정신적 '보릿고개'를 경험한다. 끊임없는 경쟁과 성과주의, 타인의 시선에 갇힌 삶은 보이지 않는 굶주림을 야기한다. 그렇기에 자연이 선사하는 위안의 가치는 오히려 더 중요해지고 있다. 수목원에 수북하게 피어난 조팝나무와 박태기나무, 그리고 곧 꽃망울을 터뜨릴 이팝나무는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 영혼의 허기를 달래주는 '마음의 밥'이 된다.

 

 

꽃은 결코 실제 밥이 될 수 없지만, 마음의 양식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굶주림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름 지었던 선조들의 지혜가,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물질적 결핍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자연에서 위안을 찾던 그 마음가짐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다양한 현대적 고단함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수목원에서 '밥이 달리는 나무들'이 피워내는 봄의 풍요로움을 오감으로 느껴보자.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맺었던 깊은 정서적 유대를 되새겨 볼 때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소복소복 피어난 꽃밥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보자. 그 순간, 우리의 눈은 배부르고, 마음은 충만해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정신적 보릿고개를 넘어서는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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